바이트와 친구들

친구들의 취향: 2019. 12.

새해가 밝았지만, 연말연시 분위기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서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춥지 않은 날씨의 지분이 가장 큰 듯하다. 이렇게 2019년과 2020년의 경계가 느슨한 틈을 타, 2019년 12월 친구들의 취향을 2020년 1월에 올려보려고 한다.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음악 애호가 10여 명이 최근의 음악 취향을 길거나 짧은 글로 이야기해주었다. 타인의 취향을 나누고 공유하는 ‘친구들의 취향’ 시리즈는, 2020년에도 쉬지 않고 이어질 예정이다.

Psycho

Red Velvet

이현호 (Bite) : '차갑게 따뜻한' 느낌의 곡들을 좋아한다. 추운 겨울날 집에 돌아와 이불을 덮고 얼어붙은 손을 녹일 때의 그런 느낌. "Psycho"는 그런 기분이 느껴지는 곡이다. "서로를 부서지게 껴안"거나 "아름답고 참 슬픈 사이"이거나, Red Velvet의 많은 곡들이 어떤 상황을 단순하게만 표현하지 않는 특징은 다른 K-POP 걸 그룹들에게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단순하다고 해서 나쁜 건 아니지만, 단순하지 않으면 사랑받기 힘든 시대에 이런 작품들이 그 경계선을 조금씩이나마 넓힐 수 있지 않을까.

띠오리아 (케이팝애티튜드 / @theoria_) : 어쩐지 자기애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무슨 상관이냐고 하면 딱히 할 말은 없다. 말 나온 김에 고백하자면, 나는 나를 싫어하는 만큼 나를 좋아한다. 정확히는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마음먹었다. 나의 자기 혐오 만큼 스스로에 대한 변명을 늘 준비했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면 이게 비뚤어진 자기애였겠지. 그렇게 어딘가 모자라고 완성되지 못한 나에게서 도망 다녔고, 지금도 도망 다니고 있다. 온전히 나를 받아들이게 된다면, 더는 자기기만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괜찮을 수 있을까.
하지만, 12월은 어쩐지 괜찮지 않은 시간이었다. 특별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냥 알 수 없는 기분에 잠식되어 헤어나올 수 없었다. 그건 불행히도 새해를 맞이한 지금까지 남아있다. 수면 위로 떠오르기 위해 노력을 하곤 있지만,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방법을 찾기란 요원하다. 드러내긴 싫어 최대한 숨겨보려 했지만 잘 되진 않았다. 그런다고 그 기분이 해소되는 것도 아닌데.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모든 건 기분의 문제다. 평생을 이겨낼 수가 없다.
뮤직비디오를 보며 하염없이 울었다. 굳이 따져보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사실 아직도 이유를 정확히는 모르겠다. 어쩌면 계속 울고 싶었는데 하필 비디오를 볼 때 나왔을지도. 발매 다음 날엔 운 좋게 당첨된 팬 파티에서 라이브를 볼 수 있었다. 응원법을 하는 팬들을 보며 멤버들도, 팬들도 모두 크게 웃으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는데, 나는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차마 울 수는 없어 꾹 참았다.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이 기분은 아마 아주 오래 가시지 않을 것 같다.


alone

Crush

이재은 (Bite) : 한 곡도 기대에 못 미치는 곡이 없었던 크러쉬의 정규 2집 [From Midnight To Sunrise]. 본인이 좋아하는 걸 누구보다도 잘 표현해내서 꾹꾹 눌러 담은 앨범인 것 같다. 따듯하고 귀여우면서도 서정적인 곡들로 채워져 있는 이 앨범은 크러쉬가 어떤 사람인지 자체를 담아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처음으로 크러쉬의 단독콘서트에 다녀 왔다. 춤도 멋있게 추고 랩도 하는 등 화려한 무대들이 많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수록곡 "alone"무대였다. 좋은 음악으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음악을 만들고 앨범을 준비하면서, 되려 본인 스스로가 힘든 시간들을 보냈다고 했다. 자기가 듣고 싶은 위로의 말을 가사로 적었다고. 멘트가 끝나고 노래가 시작되자 팬스 앞에 있던 팬이 울고 있었는지, 크러쉬는 그 팬을 발견하고선 같이 울컥해서 노래를 이어가지 못했다. 그러자 관객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크러쉬가 듣고 싶어서 써 내려갔다는 그 노랫말을 정성스럽고도 따듯하게 불러 주었다. 그 순간의 감동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어 이 노래를 들으면 여전히 먹먹하면서도 따듯한 감정이 올라온다.


Cosmic Sans

Audrey (Feat. Jack Harlow)

이상훈 (A&R / @your.anr) : 정말 많은 좋은 아티스트들이 매일 음악을 내지만 한국계 아티스트에게 먼저 관심이 가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아리스타 레코즈와 계약을 맺고 활동을 하는 20세(한국 나이로는 이제 22세)의 한국계 미국인 아티스트 오드리(Audrey)가 처음으로 랩 싱글을 냈다. 멋진 목소리로 세련된 탑 라인을 그려내는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던 그의 음악에 더욱 많은 기대를 하게 만드는 새 싱글이다.


Grow Up

¥ellow Bucks (feat. Jua, Joseph Blackwell, Flight-A & SANTAWORLDVIEW)

soulitude (정체불명) : 우리나라의 <쇼미더머니>, <고등래퍼> 시리즈 수준의 규모와 영향력은 아니지만, 일본에서도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이 다수 방영되고 있다. BS스카파-!(BSスカパー!)에서 방영하는 <BAZOOKA!!! 고교생RAP선수권(BAZOOKA!!! 高校生RAP選手権)>과 아베마TV(AbemaTV)에서 방영하는 <프리스타일 던전(フリースタイルダンジョン)>, <랩스타 탄생!(ラップスタア誕生!)>이 그 대표적인 방송들이다.
이 노래는 2018년부터 2019년에 걸쳐 방영된 <랩스타 탄생!> 시즌 3의 1위부터 5위까지의 래퍼가 모두 함께한 노래다. 이 노래만으로도 이 방송이 훌륭한 스킬을 가진 래퍼들을 발굴해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다들 경쟁 상대였던 만큼, 저마다 본인 트랙보다 더 훌륭한 기량을 선보이며 거를 파트가 없는 트랙을 완성시켰다. 2019년 일본 힙합 중에서 가장 청각적 만족감을 주었던 트랙 중 하나.


Silver Skies

MANILA GREY

KB (작곡가) : 레트로한 리듬과 신스에 요즘의 멜로디 라인이 더해진 게 인상적이었다. 과거와 현재의 요소가 조화를 이루거나 굉장히 재지한 곡에 퓨처 사운드가 더해지는 것처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소스들이 잘 뒤섞인 된 곡을 들었을때면 나 또한 장르를 넘나드는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뛴다. 그래서 내가 이런 곡들을 좋아하나보다.


The Carol

이달의 소녀 / 희진, 현진, 하슬

Urakkai haruki (연남동 음교익) : 여성분들이 부르는 가슴 뛰는 사랑 노래는 영원히 사랑받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그것의 테마가 성탄절이라면 한층 더 그래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여기저기 널려있는 제과 체인점을 건너 골목 사이에서 찾은 수제 과자점 안으로 모험을 했을 때 비로소 오감으로 영접할 수 있는 진한 우유 크림 안의 딸기 케이크. 겹겹이 쌓은 유사 사운드 오브 월에서 필 스펙터와 오오타키 에이이치 언저리를 지나 마주치는 투진의 고운 목소리. 그리고 아주 잠깐의 슈거 스팟처럼 펼쳐지는 하슬 선생의 애드립이야 말로 이 곡의 진미 아닐까요. 그것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바로.. it`s you ..you baby.. only you..


Painkiller

Ruel

김정원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 @melo7421) : 얼마 전에 추천받아 본 이 영상으로 먼저 알았다. 요상하게 너디함+레트로함, 사이버펑크스러움+밀레니얼스러움이 한꺼번에 느껴지는 스트리머 주다사(zoodasa) 버전에만 익숙해질 수도 있겠지만, 루엘(Ruel)의 존재를 간과하지 말자. 조금은 뻔한 미드 템포의 베드룸 팝처럼 느껴질 수도 있으나, 데미 로바토(Demi Lovato), 자라 라슨(Zara Larsson), 카일(KYLE) 등 여러 아티스트의 곡을 만든 프로듀서 엠-페이즈스(M-Phazes)의 산뜻한 감각이 꿈결 같은 무드를 한껏 자아낸다. 이미 너무 잘 알려져 있지만, 역시 호주에는 언제나 힙한 팝 음악이 넘쳐난다. .


Stay

Mac Ayres

김현호 (A&R / @meongtoes) : 변화가 많은 한 해였다. 나는 그대로라고 생각했는데 머무는 공간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그리운 게 많아졌고, 다시 보고 싶은 게 많아졌다. 가끔은 내가 좋아했던 그 시간, 그 공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아 두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럴 수록 오히려 같은 자리에만 머무려는 것 같아 묘한 기분이 들었다. 2019년의 막바지에는 맥 아이레스(Mac Ayres)의 곡 "Stay"를 반복해 들으며 그 마음을 달래느라 애썼다. 새해에는 이런 아쉬움이 남지 않게 어디를 가고 무엇을 보든 깊은 추억을 쌓고 기록해 볼 생각이다.


DJ Maseo (De La Soul) Boiler Room London DJ Set

Boiler Room

김용후 (비트메이커 / @yngh.hoodiak) : 그루브가 무엇인지 소울음악이 무엇인지 궁금할 때, 또는 그러한 음악을 접하고 싶은데 어떤 것부터 들어야 할지 모르겠을때 이 믹스셋을 들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부터 쿨 앤 더갱(Kool & The Gang),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까지 한시대를 풍미했던 음원들이 수록되어있고, 그것들을 자연스럽게 하나로 이어주는 DJ 마세오(DJ Maseo)의 믹싱 실력이 돋보인다. 보일러 룸(Boiler Room) 영상으로 높은 조회수를 기록한 만큼 사람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정작 영상 속 사람들은 바베큐 먹는 데에만 집중하는 게 포인트. 운전하거나 작업할 때 틀어놓기 좋은 믹스다.


ESP

N.E.R.D

심은보 (Visla Magazine 에디터 / @shimeunboss) : 금연, 금주, 헬스장 6개월 회원권, 필라테스, 다이어리 쓰기. 새해를 맞이하면 대부분 한 번쯤은 해봤을 다짐들이다. 이러한 다짐의 공통점은 작년에 열심히 하지 않은 것들 아닐까 싶다. 매해의 시작에는 이런 것들을 마인드맵 앱에 적어가며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것들을 정리하곤 했다. 하지만 2019년의 4분기를 건강상의 문제로, 열정이나 책임감의 부족 문제로 허망하게 보내고 나니 결국 남는 건 후회뿐이었다. 그래서 올해는 이 노래와 함께 시작을 함께 했다. 퍼렐 윌리엄스(Pharrell Williams)는 이 곡의 훅에서 “You got energy, but you ain’t gonna use it / You got so much time, but you ain’t gonna use it”이라는 내용을 늘어놓는다. 해석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내게는 ‘할 수 있으면서 왜 하지 않느냐’라는 꾸짖음처럼 들린다. 올해는 그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으려고 한다. 긍정의 힘 같은 이야기를 믿진 않지만, 결국 하는 만큼 얻어내는 게 세상의 이치 아니겠나.


Fiesta

IZ*ONE

김현미 (전 ㅍㅍㅅㅅ에디터, 케이팝관전러) : 이 글을 쓰기 전에 각잡고 한 번 더 들어보았다. 총 13초 걸렸다. 그렇다. 이 노래는 작년에 아이즈원이 발매를 무기한 연기한 첫 정규 앨범 ‘Bloom IZ’의 타이틀곡이자, 현재는 이 세상에 단 13초만 존재하는 곡이다. 하이라이트 메들리 영상에서만 들을 수 있다(0:13~0:26). 그럼에도 이 노래는 ‘2019년 올해의 노래’로 뽑힐 자격이 충분하다. 작년 K팝 시장을 본 사람은 모두 동의할 것이다.
2020년 1월 6일, <프로듀스X101>을 통해 데뷔한 그룹 엑스원은 해체했다. 하지만 <프로듀스48>을 통해 데뷔한 아이즈원은 활동을 재개할 예정이다. 현재 구치소에서 뼛속까지 파고드는 겨울 추위를 이겨내고 있는 안모 PD와 김모 CP는 이 두 그룹의 멤버를 전부 조작했다고 시인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 대국민오디션 사기극의 뿌리를 파낸 주체는 누구일까? <프로듀스X101>이 끝나자마자 의혹을 제기한 팬 연합이었다.
한 그룹의 해체, 그리고 한 그룹의 강행. 이는 정확히 소비자운동이 절반은 성공하고 절반은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소비자는 정확히 무엇에 대해 저항한 것일까? 2019년 한 해 동안 목격했던 K팝 시장의 윤리적 붕괴에 저항한 것이다. 그 화려한 면면은 다음과 같다: 버닝썬, 정준영 단톡방, 프로듀스 시리즈. 그리고 이어진 총 9명의 아이돌그룹 멤버 탈퇴.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도 부재를 아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게 소비자가 원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K팝 시장의 소비자들은 더 이상 비윤리적인 상품을 소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은 언제나 대중보다 느리게 윤리를 따라잡는다. 2019년은 어느새 자신들보다 아득히 앞서가 버린 대중을 따라잡느라 시장이 한바탕 홍역을 앓았던 해였다.
그러나 소비자운동이 썩은 부위를 도려내는 만능 도구는 아니다. 아이즈원이 해체하지 않았다는 게 증거다. 소비자가 아무리 윤리적 경영을 외친다 한들 공급자가 ‘사과’와 ‘적절한 보상’ 정도의 흐릿한 단어를 언급하면 법적으로 제재할 방법은 사라져 버린다. 그러니 우리는 여기에서 어떻게 더 행동할 수 있을지 망연해진다. 프듀 숙소 디오니소스 상 앞에서 촛불시위하기? 국민청원 올리기? 안모PD 재판 단체 방청?
그러거나 말거나 팬들은 13초 하이라이트 메들리의 전곡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다. 사실은 나도 좀 좋다. 그동안 아이즈원이 발표한 노래는 전반적으로 훅에서 힘이 빠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 노래에서는 고양적일 정도로 힘있게 뻗어나가기 때문이다. 선율은 멋지게 비장하고, 다소 슬프기도 하다. 아이즈원 특유의 힘차고 거침없는 소녀 같은 목소리도 정점에 달했다(13초만 들었지만… 오타쿠는 알 수 있다). 이 노래가 좋은 노래고, 듣고 싶은 노래라는 사실이 짜증 난다. 사실 프로듀스 시리즈도 잘 만든 상품이었다. 이제 우리는 상품에 뭘 요구해야 하나. 일단 이 노래의 전곡이 발표될 때 춤 좀 춘 다음 고민해 보자. 마침 제목도 축제네…